구마모토성의 역사History of Kumamoto Castle
파란과 영화로 가득 찬
「구마모토성」
400년의 이야기.
1607년(慶長12年) 자우스야마라고 불린 대지에 가토 기요마사가 당시의 최첨단 기술과 공을 들여 명성 구마모토성을 완성시킵니다. 이후 구마모토성은 400년에 걸친 일본 여러 역사의 중요한 무대가 되어갑니다. 가토 기요마사부터 호소카와 다다토시, 미야모토 무사시, 다니 다데키 등 역사에 이름을 새긴 역사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벌이는 구마모토성 400년의 역사를 천천히 관람하시기 바랍니다.
축성주 가토 기요마사
구마모토성을 축성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1562년-1611년)가 히고에 들어온 것은 27세 때였습니다. 오와리(현재 아이치현 서부) 출신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년-1598년)와는 두 사람의 어머니가 사촌 사이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히고에 들어온 후 기요마사는 계속되는 전란으로 황폐해진 히고를 바로잡기 위해 치산치수 공사와 수전 개발 등에 힘을 쏟습니다. 그 공사의 공적은 매우 커서 지금도 현역에서 이용되는 것이 있습니다. 또한, 남만무역에 몰두하는 등 영지 경영을 적극적으로 시행함으로써 히고는 풍요로워졌습니다. 그 때문에 가토 기요마사는 얼마 안 있어 영지의 백성들이 신처럼 우러러보게 되었고 지금도「세이쇼 공(清正公)」이라고 구마모토 현민에게서 친근하게 불립니다.
성주 호소카와 다다토시
부젠 고쿠라성의 성주였던 호소카와 다다토시(細川忠利)는 2대에 걸친 구마모토 성주인 가토 가문이 개역된 뒤 히고에 입국하였습니다. 호소카와 가문은 오다 노부나가(1534년-158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년-1598년),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년-1616년)를 섬기고 전국(戦国)의 세상을 헤쳐나온 다이묘 가문입니다.
호소카와 다다토시의 조부인 유사이(幽斎)는 당대 일류 문화인으로서 이름을 떨쳤고, 부친인 다다오키(忠興)는 다인(茶人)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센리큐(1522년-1591년)의 제자이기도 했습니다. 그 핏줄을 이어받은 다다토시도 문인이며 무도에도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에도시대의 유명한 무사 중의 한 명인 미야모토 무사시(1584년-1645년)가 만년을 구마모토에서 지낸 것은 다다토시가 손님으로 초청했기 때문입니다.
미야모토 무사시
해외에서도 잘 알려진「오륜서(Book of five rings)」의 저자이며, 에도시대의 유명한 검호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는 1640년(寛永17年) 57세 때 번주 호소카와 다다토시에게 초청받아 현재의 지바죠마치 부근에서 만년을 보냈다고 전해집니다. 무사시가 이곳 구마모토에서 창시한 이천일류병법(二天一流兵法)은 지금도 이도류 검술로서 계승되고 있습니다. 또한, 차(茶), 선(禅), 서화에도 정통한 문인으로서 나날을 보내, 그 작품은 시마다(島田) 미술관과 에이세이(永青) 문고 등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1645년(正保2年) 62세로 생애를 마감하고, 생전의 뜻에 따라 호소카와 번주인 에도참근교대를 향하는 분고 가도의 숲속에 갑옷 차림으로 묻힌 것으로 전해집니다.
세이난 전쟁과 다니 다데키
1877년(明治10年) 2월에 일어난 세이난(西南) 전쟁으로 구마모토성은 50여 일이나 달하는 농성전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성내에는 구마모토 진대 사령장관 다니 다데키(谷干城)가 이끄는 진대병 3500명이 농성하며 사쓰마군 13000명과 싸워 구마모토성은 근대전을 경험한 성이 되었으며, 또한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임을 명실공히 실증하였습니다만, 개전 직전에 천수와 혼마루고텐 일대가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원인으로는 방화·자연발화 등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지금까지 특정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구마모토성 니노마루 광장과 다카하시 공원 등에서는 세이난 전쟁에 얽힌 비석과 동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메이지시대의 군인을 회상하며 구마모토 성역을 산책하는 것 또한 하나의 재미입니다.
구마모토성의 연표
1588년(天正16年) | 가토 기요마사, 히고 기타한코쿠 19만 5천 석의 영주로서 隈本城(고성)에 입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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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天正18年) | 구마모토성의 개수(改修)에 착수 |
1599년(慶長4年) | 자우스야마(茶臼山)에 신성(熊本城)의 축성 착수 |
1600년(慶長5年) | 세키가하라 전투. 이 무렵 대천수 완성 |
1607년(慶長12年) | 신성이 완성되고 구마모토(隈本)를 구마모토(熊本)로 개칭 |
1611년(慶長16年) | 기요마사 49세로 타계. 아들 다다히로가 2대 번주가 됨 |
1632년(寛永9年) | 가토 가문이 개역되어 호소카와 다다토시가 히고에 입국 |
1640년(寛永17年) | 다다토시, 미야모토 무사시를 초청해 현재의 지바죠마치에 저택을 줌 |
1755년(宝暦5年) | 니노마루에 번교 시습관 개교 |
1871년(明治4年) | 폐번치현(번을 폐지하고 현을 설치) |
1874년(明治7年) | 성내가 육군 용지로 편입. 혼마루에 구마모토 진대 본영이 이전. |
1876년(明治9年) | 신풍련의 변 |
1877년(明治10年) | 세이난 전쟁. 화재로 천수·혼마루고텐 등을 소실 |
1889년(明治22年) | 구마모토 지진(긴푸산 지진)으로 재해를 입음 |
1933년(昭和8年) | 우토야구라 외 12동이 국보로, 석축·해자가 사적으로 지정 |
1950년(昭和25年) | 국보 건조물이 중요문화재로 개칭 |
1955년(昭和30年) | 특별 사적으로 지정 |
1960년(昭和35年) | 철골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대·소천수를 재건 |
1998년(平成10年) | 구마모토성 복원 정비사업 시작됨 |
2016년(平成28年) | 구마모토 지진으로 재해를 입음 |
2017년(平成29年) | 구마모토성 천수각 본격 복구에 착수 |
구마모토성의 볼거리
쇼군노마(昭君之間)의 비밀
2007년(平成19年)에 구마모토성이 축성에서부터 400년째의 시점을 맞이하였습니다. 축성 400년을 기념하여 2008년(平成20年)에 복원 준공한 것이 「혼마루고텐 오히로마(本丸御殿大広間)」입니다. 에도시대의 그림이나 문헌, 메이지 초기에 촬영된 사진, 나아가 발굴조사에서 나온 것을 단서로 하여 에도시대 모습의 혼마루고텐 오히로마를 복원하였습니다.
그 혼마루고텐 오히로마 중에서도 가장 격식이 높은 방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쇼군노마(昭君之間)」입니다. 벽과 맹장지 등에 중국 전한의 원제시대 비극의 미녀·왕소군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쇼군노마라는 명칭은 실은 쇼군노마(将軍之間)의 은어로 가토 기요마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頼)를 구마모토성에 영입하기 위해 마련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2016년(平成28年) 구마모토 지진의 영향으로 현재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또 다른 명칭은 「은행성」
천수각 앞 광장에는 구마모토성의 별칭 「은행성」의 유래가 된 큰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가토 신사 경내의 은행나무와 함께 가토 기요마사가 손수 심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러나 1877년(明治10年) 세이난 전쟁 직전에 천수·혼마루고텐이 소실되었을 때 이 은행나무도 불타고 말았습니다. 현재의 은행나무는 불탄 뒤에 자라난 새싹이 성장한 것입니다.
닌자도 오르지 못하는 「무샤가에시」
구마모토성의 석축은 통칭 무샤가에시(武者返し)라고 불립니다. 석축은 구마모토성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아래는 완만해서 쉽게 오를 수 있을 것처럼 보이나, 위로 올라갈수록 몸이 심하게 뒤로 젖혀져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무사는 물론 몸놀림이 가벼운 닌자조차도 오를 수 없다고 해서 무샤가에시라고 불립니다.
근대에 들어와서 구마모토성의 건물 대부분을 잃어버린 반면, 대부분의 석축은 당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습니다만, 2016년(平成28年) 구마모토 지진에서는 왼쪽의 석축이 침하되는 등의 피해가 있었습니다.
천수 재건
구마모토성의 옛 성역은 약 98만 평방미터, 둘레 약 5.3킬로미터의 광대한 부지에 대·소천수를 비롯해 망루49, 망루문18, 성문 29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세이난 전쟁 직전의 화재로 인해 천수를 포함해 많은 건물을 소실하였으나 우토야구라와 히가시타케노마루의 망루들 등 축성 당시의 건물도 남아 있어 13동이 국가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960년(昭和35年)에 시민의 기부금도 받으면서 철골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재건된 천수는 메이지 시대 초기에 찍힌 사진 등을 바탕으로 기와의 장수까지 충실하게 외관 복원되었습니다.
2016년(平成28年) 구마모토 지진에서 재해를 입었으나 현재는 지진에 대비한 최신기술과 전통기법을 융합시켜 지진재해 부흥의 상징으로서 복구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구마모토성의 잡학
오바케노긴타
구마모토의 전통 공예품으로「오바케노긴타」라는 장난감이 있습니다. 검은 삿갓에 붉은 얼굴, 그리고 왕눈. 뒤에 있는 끈을 잡아당기면 빙글하고 눈알이 뒤집히며 혀를 내밉니다. 이러한 자동 장치가 인기입니다. 지금도 구마모토의 향토 완구로써 만들어지는「오바케노긴타」에는 실재 모델이 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가 구마모토성을 쌓을 때, 긴타라는 최하급의 무사가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생김새로 항상 사람들을 웃기던 긴타는「익살꾼 긴타」로 불리며 인기인이었습니다. 어느덧 긴타는 전설이 되었고 그 전설을 바탕으로 카라쿠리 인형을 만든 것이 시초라고 전해집니다.
층층이 쌓인 석축
다케노마루에서 이이다마루로 향하는 통로는 6번이나 구불구불 꺾입니다. 나아가 이 통로는 에도시대에는 니시타케노마루 고카이야구라를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에 후다야구라몬(札櫓門), 모토후다야구라몬(元札櫓門)이라는 두 개의 망루문도 놓여있어 엄중한 경계였습니다. 높은 석축에 둘러싸여 층층이 겹쳐진 석축은 구마모토성을 대표하는 방비의 고안입니다.
복원공사 목수의 장난기
이이다마루 고카이야구라가 복원공사 되었을 때에 대들보에 부엉이가 새겨져 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또한, 스키야마루 니카이온히로마의 대들보에 새겨져 있는 것은 은행잎. 이것들은 모두 목재의 마디를 떼어낼 때에 목수가 장난삼아 만든 것들입니다. 어디에 새겨져 있는지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좀처럼 쉽게 발견되지 않는답니다.
※2016년(平成28年) 구마모토 지진의 영향으로 현재는 보실 수 없습니다.
축성 당시 물결모양의 깎인 흔적
축성 당시의 구마모토성은 기둥의 표면을 거칠게 마감할 때 커브가 달린 칼끝을 가진 큰 자귀가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축성 당시 그대로 남아있는 우토야구라 기둥에 있는 물결모양의 깎인 흔적입니다. 혼마루고텐을 복원할 때는 축성 당시의 것에 가까운 큰 자귀를 특별 주문하여 일부러 물결모양의 깎인 흔적이 생기도록 고안되어 있습니다.
※2016년(平成28年) 구마모토 지진의 영향으로 현재는 보실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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